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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자 한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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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노는 기원전 5세기경 카르타고의 항해자로, 아프리카 북서 해안 탐험 및 식민지화를 위해 파견되었다. 그는 60척의 함대를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여 7개의 식민지를 건설하거나 재정비했으며, 대서양 해안을 따라 더 멀리 탐험했다. 한노의 원정 거리는 1100km에서 4800km까지 추정되며, 그의 항해 기록은 그리스어 번역본으로만 남아있다. 이 기록에는 고릴라로 추정되는 생물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으며, 한노의 항해는 고대 및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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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자 한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한노 항해자
원어 이름Ἄννων (그리스어)
로마자 표기Annōn
국적카르타고
활동 시기기원전 5세기
직업탐험가, 왕 (추정)
가족마고니드 가문
업적아프리카 서해안 해상 탐험
저서항해기

2. 이름

'한노(안농)'라는 이름은 '자비로운' 또는 '온순한'이라는 뜻의 포에니어로, 아랍 이름 '하난'과 흡사하다. 히브리 이름 '하난'은 현재 이스라엘에서 사용되며 시리아어 '한나'도 레반트에서 사용된다.

한노라는 이름은 많은 카르타고인들에게 주어졌다. 항해자 한노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고대 문헌들은 그를 확실하게 식별할 만한 정보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어떤 저자들은 그를 왕이라고 불렀고, 다른 저자들은 그를 라틴어 단어인 ''dux''(지도자, 장군) 또는 ''imperator''(사령관, 황제)로 언급했다.[3] 한노의 항해기(periplus)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기록은 그를 "바실레우스"라고 칭했는데,[4] 이는 "왕"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다른 고위 카르타고 관리들에게도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였다.[5]

학계에서는 한노가 기원전 5세기에 살았던 것으로 보고 있으며,[6][10] 그를 귀족 가문인 마고니드 가문의 일원으로 파악하고 있다.[10] R.C.C. 로는 한노를 하밀카르 1세의 아들로 보고 있다.[7]

3. 생애

한노의 출생일이나 사망일, 신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에 대한 고대 기록들은 그의 신상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지 않다. 라틴어 기록에는 그를 dux(지도자, 장군) 혹은 imperator(황제, 지휘관)으로 묘사했다. 그리스어 기록은 군주를 뜻하는 단어 바실레우스를 사용했지만, 카르타고의 다른 고위 지도자들에게도 같은 단어를 썼다.[35]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그가 기원전 5세기 경의 인물이자 마고 왕조의 구성원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노라는 이름은 많은 카르타고인들에게 주어졌다. 항해자 한노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고대 문헌들은 그를 확실하게 식별할 만한 정보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어떤 저자들은 그를 왕이라고 불렀고, 다른 저자들은 그를 라틴어 단어인 ''dux''(지도자, 장군) 또는 ''imperator''(사령관, 황제)로 언급했다.[3] 한노의 항해기(periplus)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기록은 그를 "바실레우스"라고 칭했는데,[4] 이는 "왕"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다른 고위 카르타고 관리들에게도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였다.[5]

학계에서는 한노가 기원전 5세기에 살았던 것으로 보고 있으며,[6][10] 그를 귀족 가문인 마고니드 가문의 일원으로 파악하고 있다.[10] R.C.C. 로는 한노를 하밀카르 1세의 아들로 보고 있다.[7]

4. 원정

카르타고는 60척의 함대를 조직하여 한노에게 아프리카 북서 해변을 탐험하고 식민지를 건설하는 임무를 맡겼다. 한노는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여 아프리카 해변을 따라 7곳의 식민지를 건설하거나 재정비하였으며, 대서양 해변을 따라 더 멀리 탐험하였다.[35] 그의 원정 기록은 101줄 분량의 그리스어 번역본으로만 남아있는데, 이는 카르타고어 문학의 희귀한 자료이자 고대 모험가가 직접 남긴 몇 안 되는 기록 중 하나이다.[10]

원정 중, 한노 일행은 털이 많은 사람들을 발견하여 그 중 여자 셋을 포획했지만, 이들이 격렬하게 저항하여 결국 죽였다고 한다. 현지 통역은 이 털 많은 사람들을 "고릴라"라고 불렀으며, 이것이 현재 고릴라의 어원이 되었다.

4. 1. 원정 경로 및 논란

카르타고는 60척의 함대를 이끌고 아프리카 북서부 해안을 탐험하고 개척하기 위해 한노를 파견했다.[18] 그는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여 항해하였으며 아프리카 해변을 따라 7곳의 식민지를 건설하거나 재배치하였다. 그리고 대륙의 대서양 해변을 따라 더욱 멀리 탐험하였다.

한노가 어디까지 원정을 갔는지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논란이 되었다. 원정 거리는 학자들의 추산에 따라 1100km에서 4800km에 달한다. 일부 학자들은 원정대가 오늘날의 가봉까지 갔다고 보지만, 또다른 학자들은 카나리아 제도를 통과하지 못했을거라 본다.[35]

항해 경로의 "카메룬 산" 해석


그의 원정 기록은 그리스어 번역본으로만 남아있다. 101줄 분량으로 요약된 기록은 카르타고어 문학의 희귀한 자료이자, 고대 모험가가 직접 남긴 몇 안되는 기록이다. 이 요약은 Al. N. Oikonomides의 번역을 기반으로 한다.[12]

작품이 시작되면서 "이것은 카르타고인의 왕 한노가 헤라클레스의 기둥 너머 지구의 고대 리비아 지역으로 항해한 보고서이며, 그는 이를 크로노스 신전(Cronus)에 헌정했다."[13]라고 언급된다. 60척의 배와 30,000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한노는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도시를 건설하려 한다. 그는 먼저 한 도시를 세우고, 그 다음 어느 정도 거리를 항해하여 다섯 개의 다른 도시를 세운다.[14] 강에 도착한 카르타고인들은 우호적인 유목 민족인 릭시타이족을 만난다. 그들은 근처의 에티오피아에 대해 알게 되고, 릭시타이족 몇 명을 배에 태우고 다시 항해를 시작한다. 작은 섬 케르네에 또 다른 정착지가 건설된다. 크레테스 호수와 이름 없는 강 주변에는 각각 사나운 인간과 거대한 야생 짐승이 있다.[15] 케르네로 돌아온 후, 그들은 아프리카 남쪽으로 더 항해하여 릭시타이 통역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에티오피아인들을 발견한다. 더 나아가 한노는 불을 볼 수 있는 "광대한 바다의 입구"[16]를 발견한다. "서쪽 뿔"이라고 불리는 만에서 그들은 인간이 사는 섬에 상륙한다. 카르타고인들은 두려움에 질려 급히 떠나고[17] 많은 불꽃이 있는 땅에 도달한다. 그곳에는 매우 높은 산이 있다. 마침내 "남쪽 뿔"이라는 만에 도착하면, "고릴라"라는 적대적인 털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 섬이 있다. 그들 중 세 명이 죽임을 당하고, 그들의 가죽은 카르타고로 가져가진다. 식량이 부족해지자 그들은 더 이상 항해하지 않는다. 《항해기》는 귀환 여정에 대한 논의 없이 여기서 갑자기 끝난다.[8]

고대 및 현대 저술가 모두 이 작품을 비판해 왔다. 보고된 항해 거리와 방향을 토대로 하여 ''항해기''에 묘사된 장소를 찾으려는 시도는 대부분 실패했다.[9] 텍스트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학자들은 문헌 비평을 시도해 왔다. 궁극적으로, 카르타고인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실제 기록을 편집했을 것이다. 즉, 다른 국가들은 묘사된 장소를 식별할 수 없게 하고, 카르타고인들은 여전히 그들의 업적을 자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9]

오이코노미데스는 그리스어로 번역된 가설적인 푸니 문자본 자체가 불완전했을 것이라는 이론을 제기했다. 즉, 원본 ''항해기''의 뒷부분이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서술의 결말이 갑작스럽고, 묘사된 대로 탐험이 종료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지막 두 줄이 불완전한 필사본을 보완하기 위해 삽입되었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한다.[8]

금 거래는 기원전 5세기부터 카르타고 제국의 중요한 기반이었으며, 서아프리카로 가는 금 루트를 확보하려는 열망이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탐험의 원래 동기였을 수 있다.[19][9]

현대 학자들은 한노의 항해에 대해 언급하며, 많은 경우 분석은 원래 기록의 정보와 해석을 다듬기 위한 것이라고 언급했다. 윌리엄 스미스는 인원이 총 30,000명에 달했으며, 핵심 임무에는 카르타고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포함되었다고 지적했다.[20] 다른 출처에서는 이 많은 인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일부에서는 5,000명이 더 "정확한" 숫자라고 제안한다.[5] R.C.C. 로는 "한노가 가봉 지역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는 일부 해설자들이 있는 반면, 다른 해설자들은 그를 모로코 남부 이상으로 데려가지 못했다는 것은 문제의 모호성을 보여주는 척도이다."라고 언급했다.[21]

하든은 탐험대가 적어도 세네갈까지 도달했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인다고 보고한다.[22] ''항해기''의 모호성 때문에 항해 거리에 대한 추정치는 약 1126.54km 미만에서 최소 약 4828.02km까지 다양하다.[23] 일부에서는 그가 감비아에 도달했을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하든은 한노의 탐험의 가장 먼 한계에 대한 의견 불일치를 언급한다: 시에라리온, 카메룬, 또는 가봉. 그는 4040m의 화산인 카메룬 산의 설명이 기니의 890m 마운트 카쿨리마보다 한노의 설명과 더 가깝게 일치한다고 지적한다. 워밍턴은 카메룬 산이 너무 "멀다"고 간주하여 마운트 카쿨리마를 선호한다.[24]

프랑스 역사가 레이먼드 모니는 1955년 논문 ''고대 시대의 사하라 해안 항해''에서 고대 항해가(한노, 에우티메네스, 스킬락스 등)는 서사하라 영토의 보자도르 곶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서양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카르타고는 카나리아 제도의 사람들과 교역을 알고 수행했다고 전해지며, 고대 지리학자들 또한 군도를 알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남쪽은 없었다. 선미 가 없는 사각형 돛을 가진 배는 남쪽으로 항해할 수 있지만, 일년 내내의 바람과 해류는 세네갈에서 모로코로 돌아오는 여행을 복잡하게 하거나 막을 수 있다. 노젓는 배는 북쪽으로의 귀환을 달성할 수 있지만, 매우 큰 어려움과 많은 선원과 함께만 가능하다. 모니는 한노가 드라 강 어귀 이상으로는 가지 않았다고 추정하며, ''스킬락스 의사 항해기''(기원전 4세기 BC 중반)에 묘사된 탐험대에 모가도르 섬에서 발견된 유물을 귀속시키고, 더 남쪽에서 지중해 무역의 증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저자는 케이프 베르데 또는 고대 모험가들이 좌초되어 정착했을 수 있는 (서사하라 다클라 근처의) 일 드 에르네('드래곤 섬')와 같은 해안을 따라 있는 섬들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를 제안하며 결론을 맺는다.[25]

한노의 항해 경로는 현재 역사가들 사이에서 적어도 세네갈까지 이르렀다는 대략적인 합의가 있지만, 세부적인 추정은 시에라리온, 카메룬, 가봉까지 학자마다 다르다. 하지만 한노의 기록에는 카메룬 산으로 여겨지는 산의 기록이 남아있으므로, 더 남쪽으로 내려갔을 가능성도 부인할 수 없다 (단, 이 기록은 기니의 산으로 보는 이견도 있다).

4. 2. 원정 기록

한노의 원정 기록은 그리스어 번역본으로만 남아있다. 101줄 분량으로 요약된 이 기록은 카르타고어 문학의 희귀한 자료이자, 고대 모험가가 직접 남긴 몇 안 되는 기록 중 하나이다. 푸니 언어로 쓰인 원본은 유실되었지만, 그리스어 번역본은 요약되었음에도 불구하고[8][27] 모순과 명백한 오류가 포함되어 있지만,[9] 원래 카르타고 텍스트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0]

5세기에 그리스어로 번역된 이후, 여러 차례 복사되어 9세기와 14세기에 제작된 두 개의 사본이 현재까지 전해진다.[27] 콘라트 게스너는 1559년 취리히에서 인쇄된 최초의 라틴어 번역본을 제작했다.

고대와 현대의 저술가들은 이 기록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항해 거리와 방향을 바탕으로 기록 속 장소를 찾으려는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9] 학자들은 문헌 비평을 통해 텍스트의 정확성을 높이려 노력했지만, 카르타고인들이 무역 경쟁국들에게 정보를 숨기기 위해 실제 기록을 편집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9]

오이코노미데스는 그리스어 번역본 자체가 불완전하여 원본 ''항해기''의 뒷부분이 생략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서술의 결말이 갑작스럽고, 묘사된 대로 탐험이 종료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마지막 두 줄은 불완전한 필사본을 보완하기 위해 삽입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8]

한노의 전기는 그리스어로 언급되었으며, 한노가 카르타고로 돌아온 후 바알 신전에 남겨진 것이라고 한다. 이 전기는 "카르타고 제독 한노의 항해"라는 제목으로 완역되어 아리아노스, 대 플리니우스에게 알려졌다.

4. 2. 1. 기록 내용 요약

카르타고는 60척의 함대를 이끌고 한노를 파견하여 아프리카 북서 해변을 탐험하고 식민지를 건설하도록 하였다. 그는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여 아프리카 해변을 따라 7곳의 식민지를 건설하거나 재정비하였고, 대서양 해변을 따라 더 멀리 탐험하였다.[35]

한노의 원정 거리에 대해서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존재하며, 원정 거리는 1100km에서 4800km까지 다양하게 추정된다. 일부 학자들은 원정대가 오늘날의 가봉까지 도달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카나리아 제도를 넘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35]

한노의 원정 기록은 그리스어 번역본으로만 남아있으며, 101줄 분량으로 요약된 이 기록은 카르타고어 문학의 희귀한 자료이자, 고대 모험가가 직접 남긴 몇 안 되는 기록 중 하나이다.

이 요약은 Al. N. Oikonomides의 번역을 기반으로 한다.[12] 고유 명사는 번역에서 변경되지 않았으며, 이는 번역자의 견해를 반영하며 학자들 사이에서 더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론을 무시할 수 있다.

"이것은 카르타고인의 왕 한노가 헤라클레스의 기둥 너머 지구의 고대 리비아 지역으로 항해한 보고서이며, 그는 이를 크로노스 신전(Cronus)에 헌정했다."[13]라는 문장으로 작품이 시작된다. 한노는 60척의 배와 30,000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도시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는 먼저 한 도시를 세우고, 어느 정도 거리를 항해하여 다섯 개의 다른 도시를 건설하였다.[14] 카르타고인들은 강에서 우호적인 유목 민족인 릭시타이족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근처의 에티오피아에 대한 정보를 얻고 릭시타이족 몇 명을 배에 태우고 다시 항해를 시작하였다. 작은 섬 케르네에 또 다른 정착지가 건설되었고, 크레테스 호수와 이름 없는 강 주변에는 각각 사나운 인간과 거대한 야생 짐승이 있었다.[15] 케르네로 돌아온 후, 그들은 아프리카 남쪽으로 더 항해하여 릭시타이 통역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에티오피아인들을 발견한다. 더 나아가 한노는 불을 볼 수 있는 "광대한 바다의 입구"[16]를 발견하고, "서쪽 뿔"이라고 불리는 만에서 인간이 사는 섬에 상륙한다. 카르타고인들은 두려움에 질려 급히 떠나고[17] 많은 불꽃이 있는 땅에 도달한다. 그곳에는 매우 높은 산이 있었다. 마침내 "남쪽 뿔"이라는 만에 도착하면, 고릴라라는 적대적인 털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 섬이 있다. 그들 중 세 명이 죽임을 당하고, 그들의 가죽은 카르타고로 가져가진다. 식량이 부족해지자 그들은 더 이상 항해하지 않는다. 《항해기》는 귀환 여정에 대한 논의 없이 여기서 갑자기 끝난다.[8]

카르타고 발전기에 카르타고 정부는 서아프리카 연안 지역에 건설 가능한 다른 식민 도시를 찾고 있었고, 이 명령에 따라 한노는 60척의 선단을 이끌고 카르타고를 떠났다. 그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코트디부아르 부근까지 도달했다.

그는 이 항해의 기록을 남겼으며, 그 중 한 구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항해 중에 털이 많은 인간들을 발견하여 그 중 여자 3명을 포획했지만, 여자들이 매우 흉폭하게 저항하여 그들을 죽였다고 한다. 현지 통역에게 이 털복숭이 여자들이 어떤 인종인지 묻자, 통역은 "고릴라"라고 불렀다.

이것이 현재 고릴라의 어원이 되었다. 이 기록은 후에 그리스어로 번역되었고, 더 나아가 라틴어를 통해 현재까지 전해졌다.

4. 2. 2. 기록의 진위성 및 비평

한노의 원정 기록은 그리스어 번역본으로만 남아있으며, 101줄 분량의 요약본은 카르타고어 문학의 희귀한 자료이자, 고대 모험가가 직접 남긴 몇 안 되는 기록 중 하나이다.[35] 푸니 언어 원본은 유실되었지만, 그리스어 번역본은 요약되었음에도 불구하고[8][27] 모순과 오류가 포함되어 있지만,[9] 원래 카르타고 텍스트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0] 이 ''항해기''는 "카르타고 '문학'의 표본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남아 있으며[10] 탐험가 자신이 직접 쓴 고대 탐험에 대한 몇 안 되는 현존하는 기록 중 하나이다.[11]

5세기에 이 텍스트는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수 세기에 걸쳐, 이 번역본은 그리스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로마 서기들에 의해 여러 번 복사되었다. 9세기와 14세기에 제작된 두 개의 사본이 현존한다.[27]

고대 및 현대 저술가들은 이 작품을 비판해 왔다. 보고된 항해 거리와 방향을 토대로 ''항해기''에 묘사된 장소를 찾으려는 시도는 대부분 실패했다.[9] 텍스트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학자들은 문헌 비평을 시도해 왔다. 카르타고인들이 자신들의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실제 기록을 편집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즉, 다른 국가들이 묘사된 장소를 식별할 수 없게 하고, 카르타고인들은 여전히 그들의 업적을 자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9]

오이코노미데스는 그리스어로 번역된 가설적인 푸니 문자본 자체가 불완전했을 것이라는 이론을 제기했다. 즉, 원본 ''항해기''의 뒷부분이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서술의 결말이 갑작스럽고, 묘사된 대로 탐험이 종료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지막 두 줄이 불완전한 필사본을 보완하기 위해 삽입되었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한다.[8]

한노의 전기는 그리스어로 언급되었으며, 이 전기는 한노가 카르타고로 돌아온 후 바알 신전에 남겨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카르타고 제독 한노의 항해"라는 제목으로 완역되어 아리아노스, 대 플리니우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4. 3. 고릴라

''항해기''의 마지막 부분은 털이 많고 사나운 사람들이 사는 섬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남자들을 붙잡으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여자 셋을 붙잡았지만, 너무 사나워서 죽였고, 그들의 가죽을 카르타고로 가져왔다.[26] 가죽은 한노가 돌아왔을 때 유노 신전(혹은 아스타르테)에 보관되었으며,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한노의 탐험으로부터 약 350년 후인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 멸망까지 살아남았다.[27][28]

한노의 아프리카 부족(리시테스 또는 나사모니안) 통역사들은 그들을 ''고릴라이''(그리스어로 Γόριλλαιgrc)라고 불렀다.[26] 1847년에 고릴라라는 유인원 종이 과학적으로 기술되었고, ''고릴라이''에서 이름을 따왔다. 저자들은 한노의 ''고릴라이''가 고릴라와 동일하다고 단정적으로 밝히지 않았다.[29]

한노 일행은 항해 중에 털이 많은 인간들을 발견하여 그 중 여자 3명을 포획했다. 그러나 여자들은 매우 흉폭하게 저항하여 그들을 죽였다고 한다. 현지 통역에게 이 털복숭이 여자들이 어떤 인종인지 묻자, 통역은 "고릴라"라고 불렀다. 이것이 현재 고릴라의 어원이 되었다. 이 기록은 후에 그리스어로 번역되었고, 더 나아가 라틴어를 통해 현재까지 전해졌다.

5. 전승

이 텍스트는 로마의 대 플리니우스(23–79년경)와 그리스의 아리아노스(86–160년경)에게 알려져 있었다.[30][31]

대 플리니우스는 ''박물지'' 2.67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플리니우스는 실제 날짜를 몰랐기 때문에 시간을 모호하게 기록했을 수도 있다.[19] 한노가 아프리카를 완전히 일주하여 아라비아에 도달했다는 그의 주장은 현대 학계에서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아리아노스는 그의 저서 ''알렉산드로스 원정기'' VIII (인디카)의 마지막 부분에서 한노의 항해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기원전 430년경에 글을 쓴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모로코 해안에서의 카르타고 무역을 묘사했지만(《역사》 4.196[32]), 그가 한노의 항해 자체를 알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다.[19]

앞서 언급했듯이 한노의 전기는 그리스어로 언급되었으며, 이 전기는 한노가 카르타고로 돌아온 후 바알 신전에 남겨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카르타고 제독 한노의 항해"라는 제목으로 완역되어 아리아노스, 대 플리니우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6. 현대의 평가

그의 이름을 따서 한노라는 달의 크레이터가 명명되었다.[33]

참조

[1] 서적
[2] 웹사이트 Ἄννων https://logeion.uchi[...] University of Chicago 2020-10-29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문서 The six cities are named, in the order of the original, Thymiaterion (the first founded), Karikon Teichos, Gytte, Akra, Melitta, and Arambys.
[15] 문서 Hippopotami and crocodiles are the two animals mentioned.
[16] 서적
[17] 문서 The text does not record any word about an actual interaction between the Carthaginians and the unnamed people on the island.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22] 서적
[23] 서적
[24] 서적
[25] 서적
[26] 서적
[27] 서적
[28] 서적
[29] 서적
[30] 서적 https://www.perseus.[...]
[31] 서적
[32] 서적 https://www.perseus.[...]
[33] 웹사이트 Planetary Names: Crater, craters: Hanno on Moon http://planetaryname[...] International Astronomical Union, United States Geological Survey, and 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2020-10-31
[34] 서적
[35] 웹인용 Hanno: Carthaginian Explorer https://www.worldhis[...] 2023-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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